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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정](10) 필생의 사업은 '우정의 종각' 한국전 기념공원 조성

이민 이백주년 행사 열리는 꿈 꾸며 추진 고 김영옥 대령 명예훈장 추서 추진됐으면 새해가 되면 나는 미리 ‘세뱃돈’을 챙겨둔다. 한인 정치인들에게 나눠줄 헌금이다. 연초가 돼서 그냥 ‘세뱃돈’이라고 부르는 거지 실제 절을 받거나 하는 경우는 없다. 나는 그 분들이 도움을 요청하기 전 미리 체크를 써준다. 이왕 주는 건데 일찌감치 드려야 요긴하게 쓸 것 같아서다. 솔직히 ‘짜다’는 소릴 많이 듣지만 한인 정치인들에게 만큼은 아끼지 않는다. 개인이 줄 수 있는 최고액, 곧 7500 달러를 수표로 끊어 준다. 돌이켜 보면 지난해 만큼 신나는 해도 없었지 싶다. 11월 선거에서 남가주의 영 김과 미셸 박 스틸 두 분이 동반 당선되는 쾌거를 이뤘기 때문이다. 문득 지난 2003년 이민백주년의 캐치프레이즈 ‘자랑스런 과거, 약속된 미래’가 떠오른다. 두 분이 ‘자랑스런 과거’를 바탕으로 ‘약속된 미래’를 펼쳐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재선에 이어 3선, 4선…. 영 김 의원에겐 사실 빚을 많이 졌다. 에드 로이스 의원 보좌관 시절, 국군포로송환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하원에서 만장일치 통과된 데는 김 의원의 수고가 많았다. 김 의원의 캠페인과 관련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지난해 선거 막바지에 현직인 ‘백만장자’ 길 시스네로스가 예상을 뒤엎고 물량공세를 퍼부었다. ‘실탄’이 거의 바닥난 김 의원 측에서 긴급 구원 요청이 왔다. 그러나 개인이 줄 수 있는 기부금은 제한돼 있어 나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즉시 지인들을 불러 모았다. 십시일반 돈을 모아 김 의원 측에 전달해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김 의원의 당선 소식을 듣고는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미셸 박 스틸 의원은 그릇이 아주 큰 분이다. 언젠가 기금모금 행사에서 “저는 괜찮으니 영 김에게 기부금을 몰아주세요”하는 말을 듣고는 감동을 먹었다. 김 후보에게 기부금이 쏠리면 자기가 챙겨야 할 몫이 그 만큼 줄어들텐데…. 그런데도 자신을 낮추며 희생하는 마음씨에 정말 반했다. ‘그늘이 넓은 나무 밑에는 새들이 모이고, 가슴이 넓은 사람 밑에는 사람이 모인다’는 옛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다. 단언컨대 두 의원은 ‘가슴이 넓은’ 분들이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두 분이 제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의 영웅 김영옥 대령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가 참전했던 프랑스와 한국 등 국가들에선 모두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는데 정작 자신의 조국인 미국에선 홀대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두 의원이 앞장서 ‘명예훈장(Medal of Honor)’ 추서 캠페인을 벌여줬으면 더는 바랄 게 없겠다. 또다른 한국전의 영웅을 위해 할 일이 남아 있다. 올 상반기 중 LA한인타운 인근의 맥아더 파크에 한국전 기념 벽화를 제작하고 주변 환경미화에 힘을 쏟을 생각이다. 적잖은 경비가 들어갈테지만 자비로 충당할 생각이다. 벽화는 동상 뒷편에 세워진다.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기념비적인 장면들을 담는다. 이미 ‘독도화가’ 권용섭 화백에게 벽화제작을 위촉한 상태다. 시정부도 흔쾌히 승인해줘 걸림돌은 없다. 당초 지난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70주년을 맞아 계획한 것인데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미뤄졌다. 맥아더 파크의 동상을 인천과 연관시켜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전혀 관련이 없다. 필리핀(레이테) 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필리핀계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동상을 만들었다. 공원이름은 원래 ‘웨스트레이크 파크’였으나 태평양 전쟁 때 ‘맥아더 파크’로 바꿨다. 암울했던 그 당시 ‘그래도 맥아더가 우릴 구해주겠지’하는 미국인들의 염원을 담아 전국의 많은 공원, 학교, 공항, 거리 이름들이 맥아더로 바뀌었다고 한다. 내겐 필생의 사업이 하나 있다. 샌피드로 ‘우정의 종각’ 인근 부지에 한국전참전 16개국 기념공원(가칭)을 세우는 일이다. 연방정부 소유여서 허가를 받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참전국 마다 별도의 기념관을 만들어 이들의 희생을 기리는 한편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는 교훈을 후대에 심어줄 작정이다. 프로젝트의 테마는 전쟁이 아닌 평화와 번영으로 잡았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참전 덕분에 대한민국은 지금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세계 10위권 경제강국의 지위가 거저 얻어진 게 아니다. 샌피드로엔 ‘흥남철수’의 주역 빅토리호(Meredith Victory)도 전시돼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이 배를 타고 자유의 땅에 안착할 수 있었다. 1만5000톤에 불과한 화물선이 7000명이 넘는 피란민들을 태워 세계전쟁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나는 지금도 레너드 라루 선장의 회고에서 삶의 영감을 얻는다. “어떻게 이 작은 배가 그 많은 사람들을, 그 위험한 항해에서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구조할 수 있었는지…. 그해 성탄절, 나는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고 믿는다.” 라루 선장은 은퇴 후 수도원에 들어가 전쟁에 쓰러진 영혼들을 위해 여생을 바쳤다. 이외도 종각 인근엔 ‘맥아더 기지(Fort MacArthur)’도 있어 이 일대를 한 묶음으로 연결하면 LA의 유명 관광명소로 부상할 가능성도 크다. 한인커뮤니티의 ‘억만장자’ 한 분께 이 프로젝트를 설명하며 함께 종잣돈을 마련해 성사시키자고 제안해 놓은 상태다. 오렌지카운티 웨스트민스터의 ‘리틀 사이공’에도 베트남전 참전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미군과 베트남(월남) 병사들이 손을 맞잡고 있는 동상이 먼저 눈길을 끈다. 150만 달러가 들었는데 모두 모금으로 충당했다고 한다. 공원을 둘러보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나는 가끔 꿈을 꾼다. 2103년의 미주이민 이백주년 기념식이 샌피드로의 한국전 참전기념 공원에서 열리는 그런 꿈이다. 1903년 하와이의 사탕수수밭, 2003년의 로즈 퍼레이드 꽃차, 2103년의 16개참전국 대표가 모두 참가하는 평화와 번영의 축제. 그런 꿈을 가져본다. 우리가 얼마나 치열하게 2000년대를 살았는지 백년후 후손들이 알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변변치 않은 삶을 살아온 저의 글을 읽어주신 중앙일보 독자님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박용필 전 논설고문

2021-02-15

[토마스 정](9) 북한서 생환 노병 보고 '전우 구하기' 작전

한국과 미국서 백방으로 뛰었지만 성과 없어 한인 정치인 필요성 절감 1.5세 후견인 역할 1994년의 어느날. 우연히 한국어 TV방송을 보다가 생뚱맞은 장면에 눈길이 갔다. 대한민국 육군 예복 차림에 소위 계급장을 단 노인이 누군가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있었다. “군번 xxxxx. 육군 소위 조창호. 오늘부로 본대에 복귀하였음을 신고합니다.” 북한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목숨을 걸고 탈출해 40여 년만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정전협정에 따라 양 측이 수용했던 포로들은 각자의 의사에 따라 모두 송환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난데 없이 포로라니. 그 노인(조 소위)의 말은 그러나 ‘픽션’이 아니었다. 그 순간 내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을 해댔다. 실종된 내 고향 후배 김용석 소위, 내 부하들, 내 동기생들…. 아직도 북녘땅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만 같았다. 벌떡 일어나 상의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미국에 와서도 늘 품고 다녔던 육군종합학교(전시사관학교) 8기 동기생 명단이다. 199명 가운데 절반 가량이 전사 또는 실종자로 분류돼 있었다. “살아만 있어다오. 내가 꼭 구해줄게.” 나는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미국에 살면서 잊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건만~. 1950년의 잔인했던 그 겨울, 그 악몽이 되살아나며 내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전쟁이 터진 해 나는 소위로 임관해 강원도의 8사단에 배속됐다. 제 16연대 제1 대대 제 4중대(중화기 중대) 중대장. 8사단은 원래 유엔군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에 포위돼 전멸하다시피 했다. 재편성된 사단은 장교도, 사병도 대부분 신참으로 채워졌다. 전투경험이 거의 없어 리더십은 애시당초 실종상태였던 것. 우리 중대는 인민군과 교전을 벌이며 제일 먼저 양구에 진입했다. 험준한 산악지대여서 미군의 포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얼마나 치열했는지 고지의 주인이 밤과 낮으로 바뀌었다. 낮엔 국군이 점령하고, 밤엔 인민군에 빼앗기고. 그해 겨울은 한밤중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떨어졌다. 방한복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탓에 병사들은 불을 지펴 몸을 녹였다. 이 바람에 적의 손쉬운 공격표적이 됐다. 이른바 ‘앉아 있는 오리(sitting duck)’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일 터다. ‘높은 분’들은 이미 전투가 시작도 되기 전에 도망쳐버렸다. 그것도 모르고 고지를 사수했으니. 중대 병력 168명 가운데 생존자는 30명에 불과했다. 할 수 없이 철수명령을 내렸다. 어디쯤 내려왔을까. 부상병을 업은채 쓰러지고 말았다. 내가 의식을 잃었을 때는 눈이 막 퍼붓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부하들은 내가 5분만 늦었어도 폭설에 묻혀 구조할 수 없었다며 하늘이 나를 살려줬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내 몸은 얼어 붙어있었다. 마른 나뭇가지를 구해 불을 지핀 다음 부하 여섯이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마치 통돼지 구이하는 것 처럼 나를 돌려가며 불에 쐤다고 한다. 피가 다시 흐르면서 의식을 되찾은 것. 나는 이렇게 부하들에 내 목숨을 빚졌다. 더욱 참담했던 건 내 연락병과의 엇갈린 운명이다. 중대장의 굶주림을 보다 못해 포위망을 뚫고 민가를 찾아갔다가 그만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나 대신 전장의 이슬이 되어버린 연락병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간신히 살아 돌아온 나는 또 한번 좌절했다. 상관의 지시없이 후퇴했다며 나를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는 게 아닌가. 총살형 운운하며…. 맨 먼저 도망간 게 누군데. 이런 비겁한 자들이 전쟁을 지휘하다니 분노가 치솟았다. 또다시 살육의 현장에 내몰렸으나 이번엔 중상을 입었다. 왼쪽 다리 관통상을 당한 것. 결국 ‘상이군인’으로 분류돼 군을 떠나게 됐다. 1계급 특진과 함께 훈장도 달아줬지만 나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부조리가 판치는 군이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창호 소위의 갑작스런 출현이 나를 내 부하들 곁으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나만 잘 살겠다며 미국에 온 내가 부끄러워졌다. 부하들에 속죄하는 심정으로 국군포로송환에 매달렸다. 한국의 여야 정치 지도자들을 두루 만났으나 죄다 ‘립서비스’ 뿐 실천의지가 전혀 없었다. 그래도 내게 힘이 되어줬던 유일한 분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꼭 북측에 국군포로송환을 요구하겠다며 믿어달라고 했다. 남북정상회담에서 노 전 대통령은 약속대로 국군포로 문제를 꺼냈다. 인도주의에 입각해 돌려보내줄 것을 요구했으나 김정일은 아예 대꾸조차 안했다고 한다. 비록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나는 노 전 대통령에 마음의 빚이 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게 버팀목이 되어준 이는 ‘북한 인권투사’ 수잔 숄티 여사다. 우연히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만난 숄티는 무대를 워싱턴 의사당으로 옮겨 포로문제를 이슈화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2005년 4월 조창호 소위 등 포로 두 분을 자비로 초청해 연방의사당에서 토론회를 열었다. 북에 강제 억류된 국군포로들의 참상이 처음으로 미 정치권에 알려져 반향이 컸다. 2011년에는 연방하원이 전쟁포로 즉각 송환을 요구하는 결의안(HR 376)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작 포로송환에 적극 나서야 할 한국정부가 무관심으로 일관해 이제 포로송환운동은 접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북의 생존 포로는 많아봤자 150여 명 가량이다. 모두 90대의 노쇠한 분들이어서 북에서 생을 마감해야 할 처지다. “살아만 있어다오”하며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이젠 저 세상에서나 만나 용서를 빌어야 할 것 같다. 약속을 못지켜 미안했다고. 포로송환 캠페인을 벌이면서 많은 이들을 만났지만 숄티 여사와 같은 분은 드물었다. 돈이 없어 작품을 무대에 올리지 못하고 있는 탈북 연극인의 딱한 사연을 듣고는 자신의 집을 저당잡혀 비용을 대 주기도 했다. 그 연극인이 내게 들려준 얘기다. 그래서 나는 그 분 앞에만 서면 왠지 작아지는 느낌이 들곤한다. 한국인 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다는 숄티 여사다. 포로송환문제로 워싱턴을 수차례 오가며 얻은 교훈이 하나 있다. 한국계 선출직 공무원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절감한 것이다. 우리의 목소리를 전달해 줄 우리의 의원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한인 1.5세들의 정치후견인 역을 자임한 것도 이같은 배경에서다. 박용필 전 논설고문

2021-02-10

[토마스 정](8) 2003년 로즈 퍼레이드 '한인 꽃차'에 올인

‘100년만의 일’ 호소에 주최측 절대 불가 입장 바꿔 2005년 연방의회 '한인의 날' 결의안 만장일치 통과 이민 백주년 기념행사는 모름지기 한인 커뮤니티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벤트였다. 예산을 편성해 보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80만 달러는 족히 필요했다. 내가 먼저 12만 달러를 냈다. 기금모금과 관련해 내게 감동을 준 분이 있다.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시다. “언론사는 무릇 커뮤니티의 친구 같은 존재가 돼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개인 돈 1만 달러를 보내왔다. 내겐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큰 격려였다. 나는 동전 한 닢 허투루 쓰지 않았다. 식사 등 경비도 각자 부담을 원칙으로 했다. 너무 깐깐하다는 불평이 쏟아졌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 자신 한인단체들의 ‘행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또 봐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시계를 1960년대로 되돌려 보자. 이민이 본격화되기 전이어서 LA 한인인구는 유학생들이 고작이었다. 한인회(처음엔 한인센터로 불렸다)라고 해봤자 몇몇이 모인 친목단체에 불과했던 것. 모두들 가난해 회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한인회의 ‘물주’는 찰스 H. 김(한국명 김호). 한인 이민 역사상 처음으로 백만장자의 반열에 오르신 분이다. 그 분이 한인회관 건립기금으로 1만 달러를 내놨다. 그런데도 한인회는 돈이 떨어지면 그에게 손을 벌렸다. “모이면 싸움질만 하는데 내가 왜 당신들한테 돈을 줘야 하느냐”고 호통을 쳤지만 며칠 후엔 슬그머니 또 돈을 보내왔다. 그 돈을 아껴 쓰기는커녕 먹고 마시며 탕진하기 일쑤였다. 한인회를 자신들의 클럽하우스쯤으로 여겼다고 할까. 찰스 김은 김형순과 함께 ‘김 브라더스’를 설립, 농장을 기업화해 부를 일궜다. 두 사람이 친형제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 피한방물 섞이지 않은 남남이다. 그런데도 계약서 한 장 없이 평생 비즈니스를 함께 했으니 시쳇말로 ‘연구대상’이라고 해야 할지. 며칠 전엔 그 분과의 인연을 떠올리게 하는 기사를 읽고 감회에 젖기도 했다. 한국서 씨 없는 포도가 인기를 끌고 있다며 이젠 한국이 보유한 종묘가 일본을 제치고 세계 5위권으로 부상했다는 내용이다. 사연은 이랬다. 1960년대 초 한국의 지인 한 분이 내게 씨 없는 포도 종묘를 구할 수 있느냐고 문의해 왔다. 찰스 김으로부터 종묘를 얻어 곧바로 보냈다. 씨 없는 포도는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에 처음 보급된 것이다. 나도 한국의 종묘산업에 일조를 한 것 같아 뿌듯해 진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이민백주년 기념사업의 하이라이트는 패서디나의 로즈 퍼레이드 참가다. 미 전역에 생중계되는 신년맞이 최대규모의 축제여서 우리 이민역사를 홍보하는데 이 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을 터다. 행사를 주관하는 패서디나 상공회의소 측에 참가의사를 밝혔다. 뜻밖에도 회신은 ‘절대 불가.’ 최소 5년 전엔 신청해야, 그것도 심사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이유를 댔다. 한마디로 ‘꿈 깨라’는 거 아닌가.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한인 커뮤니티로선 백년만에 한 번 맞는 경사라며 로비를 벌였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백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 감동을 줬는지 주최 측으로부터 특별 허가가 떨어졌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그날 밤잠을 설쳤다. 현장에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꽃차 제작에 매달렸다. 한인학생들이 성탄절 휴가를 반납해 가며 자원봉사를 해줘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성서에 나오는 ‘사랑의 수고(labor of love)’는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꽃차 장식은 규정상 모두 생화를 쓰게 돼있다. 전세계의 장미란 장미는 모두 로즈 퍼레이드에 동원된다는 얘기가 결코 우스개는 아니란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또 하나 꽃차와 관련해 중앙일보에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코리안 로즈 퀸’을 선발해 꽃차에 태우자는 안을 내놨다. 주최 측은 그러나 ‘로즈 퀸’은 퍼레이드의 심볼이나 다름없어 어느 누구도 사용할 수 없다고 통보해 왔다. ‘퀸’을 뽑기는 뽑아야 하는데…. 신문사 측에서 ‘센테니얼 퀸(Centennial Queen)’을 제안했다. ‘(이민) 백주년의 여왕’이다. 중앙일보 측은 선발전을 통해 ‘퀸’ 한 명과 ‘프린세스’ 4명 등 모두 5명을 뽑았다. 미인선발대회가 아니어서 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이민사 숙지 여부 등을 심사해 뽑았다. 이들은 꽃차 탑승은 물론 그해 한인 커뮤니티의 홍보사절로 활동해 백주년을 맞는 우리 이민역사를 주류사회에 두루 알렸다. 프린세스 중에는 미 육사(웨스트포인트) 출신도 포함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꽃차에는 이외도 박찬호(LA 다저스), 로널드 문(하와이주 대법원장) 등 한인사회를 빛낸 인물 29명이 탔다. 새해 첫 날 백만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이민 백주년 꽃차가 밴드를 앞세워 퍼레이드에 나서자 나는 울음을 삼켰다. 나 보다 앞서 살다 간 이민 선배들이 생각나서다. 그 분들이 오늘의 이 장면을 봤으면 얼마나 감격해 했을까. 대망의 2003년 1월 1일은 꽃차 퍼레이드로 마감했지만 내겐 또 마지막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백년 전 1월 13일, 우리 선조들이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처음 미국 땅을 밟은 그 날을 영구 기념일로 제정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연방의회에 냈다. ‘꿈은 꾸는 게 아니라 이루는 것’이라고 했던가. 2년 후 결국 꿈이 성취됐다. 에드워드 케네디, 대니얼 이노우에, 조지 앨런, 딕 더빈, 시어도어 스티븐스 상원의원 등이 우리의 요구를 결의안으로 만들어 상원 전체 회의에 올렸다. 2005년 12월 16일, 결의안(S. Res. 283)은 표결없이 구두로 만장일치 통과됐다. 이후 매년 1월 13일은 ‘코리언 아메리칸 데이’로 지정돼 해마다 빠짐없이 경축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결의문에는 찰스 김의 공적도 들어가 있다. 미국 최초로 넥타린(털없는 복숭아) 묘종을 개발했다는 내용과 함께. 이외도 제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영웅 김영옥 대령,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새미 리 박사 등 한인 이민 역사의 아이콘들이 결의문에 포함됐다. 결의문을 받아든 날 나는 이렇게 빌었다. “선배님들이여, 당신들의 땀과 열정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 세상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박용필 / 전 논설고문

2021-02-08

[토마스 정](7) "좋은 친구와 직원들은 나의 재산목록 1호"

지인들 덕에 이민 100주년 사업 성공적 진행 묵묵히 일해주는 장기 근속 직원들에 감사 30년 전 내가 미주은행(나라은행의 전신)에 투자한 돈은 30만 달러다. 은행감독국이 요구한 자본충당금 150만 달러 가운데 5분의 1을 내가 맡은 셈이다. 1주 당 3 달러에 모두 10만 주를 배당받아 대주주가 됐다. 주주로 참여하신 분들 가운데는 다운타운에서 의류 봉제로 사업을 키운 분들이 많았다. 우병우, 김탁, 김용환씨 등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아메리칸 드림을 일궈낸 분들이다. 내가 이사장을 맡아 은행 살림을 꾸렸다. 벤자민 홍 행장의 뛰어난 경영수완으로 은행은 매년 35%씩 성장을 거듭했다. 주가도 당초 3 달러에서 4 달러, 20 달러, 주식 분할도 세 차례나 이어졌다. 훗날 내가 이사를 그만 둘 때는 주식이 27 달러까지 뛰었다. 직원들도 신이 나 열심히 일했다. 어느핸가 연말 파티에서 일어난 해프닝이다. 어느 부장이 툴툴댔다. 은행 측이 준비한 선물꾸러미가 성에 안찼던 모양이다. ‘은행이 누구땜에 이 만큼 컸는데…’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순간 나도 모르게 버럭했다. “주식회사는 누굴 위해 존재합니까.” 갑작스런 내 질문에 모두 당황한 듯 했다. “주주의 이익입니다. 주주….” 나는 주주를 몇번이나 되뇌었다. 다 망해가는 회사를 살린 건 주주들의 투자 덕분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좀 살만해졌다고 흥청망청 쓰면 주주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따끔하게 일러줬다. 내 ‘훈계질’이 먹혔는지 이후 은행 파티는 조촐하고 검소하게 치러졌다. 이사장 재임시 내가 ‘군기’를 잡은 일이 또 하나 있다. 회의시간 엄수다. 이사들은 각자 생업이 있어 회의는 주로 저녁 7시에 열렸다. 그런데 제 시간에 오는 분들이 거의 없었다. 10분, 20분, 심지어 1시간 늦게 와도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이른바 ‘코리안 타임’이 몸에 배였다고 할까. 담당 직원에게 7시 정각이 되면 문을 걸어 잠그라는 지시를 내렸다. 일부 이사들은 내가 너무 ‘빡빡하다’는 푸념을 해댔지만 나는 시간 문제 만큼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거래선과 계약을 맺는 자리에도 10분 늦게 나타날 것인가”하며 큰소리를 냈다. 내게 시간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 재산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지각에 대해 무관용 원칙을 밝히자 얼마안가 이사회가 정시에 열리게 됐다. 늦기는커녕 10분 일찍 와 그날 토의할 아젠다를 미리 점검하는 등 ‘이색적인’ 장면이 연출된 것. 이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은행업무 쇄신에 큰 기여를 했다고 감히 자부한다. 매해 목표치를 상회하는 실적을 올리다 보니 은행 몸집이 커졌다. 다음 단계는 인수합병(M&A). 한인은행으론 처음으로 M&A에 나섰다. 인수하는 쪽이 아무래도 합병을 당하는 쪽보다 우위에 있는 건 사실이다. 지점도 통폐합되는 등 물갈이 대상의 폭이 커진다. 합병대상 은행장은 당연히 퇴직 제 1호다. 한미은행과의 인수합병을 추진할 때 얘기다. 양측 이사들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 어려운 상황이 됐다. 이때 유재환 당시 한미은행장이 나를 찾아왔다. “이사장님, 합병을 더 강력하게 밀어붙이세요.” 유 행장의 주문에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합병되면 유 행장 자신의 목이 제일 먼저 날아갈텐데…. 유 행장은 그러나 커뮤니티 은행이 성장하려면 합병 외엔 대안이 없다며 자신의 거취따위는 고려하지 말라고 했다. 이후 공교롭게도 유 행장이 맡은 은행이 또 다시 나라은행의 공격목표가 돼 얼마나 미안했든지. 그래도 불쾌한 내색하지 않고 내게 합병을 권했다. 연배로는 내 조카뻘이지만 나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그 분의 '됨됨이’를 존경한다. 모임이 있을 때는 꼭 유 행장을 상석에 앉힌다. 내겐 그가 ‘어르신’이다. 박창규 전 한미은행 이사장은 나의 영원한 ‘주치의’이시다. 내가 몸이 아파 전화를 걸면 한밤중, 새벽녘이라도 한걸음에 달려온다. 약사 출신이어서 의학상식이 웬만한 의사 뺨칠 정도다. 내겐 말년에 믿고 의지하는 몇 안되는 친구 중 한 분이다. 윌셔은행의 고석화 전 이사장은 한마디로 ‘젠틀맨’이다. 매사에 맺고 끝는게 분명한 분이다. 내가 미주한인이민 백주년기념사업회를 맡고 있을 때다. 한인은행들을 찾아 다니며 기금을 모았다. 은행마다 1만 달러를 냈는데 윌셔 은행만 5000 달러를 고집했다. 그러자 고 이사장이 선뜻 5000 달러를 개인체크로 내 1만 달러를 맞춰줬다. 얼마나 고마웠든지. 새크라멘토에서 열린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미주한인의 날 기념 선포식에는 나 대신 참석해줘 지금도 감사할 따름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살아오면서 이처럼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내게 재산목록 1호를 대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친구들을 꼽는다. 그래서 옛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명언을 남겼지 않나 생각이 든다. ‘친구는 제2의 자신이다(A friend is a second self)’. 나는 2500년이 지난 오늘도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뭐니 뭐니해도 묵묵히 내 뒷바라지 하는 회사(His & Her Hair) 직원들이야 말로 내가 가장 신뢰하는 친구들이다. 게중에는 거의 40년을 나와 함께 동고동락한 분도 있다. 그는 중학생 때 이민와 대학졸업후 첫 직장이 지금의 내 회사다. 30여 직원들의 평균 근무연수는 거의 20년을 헤아린다. 우스개로 ‘등 떠밀며 나가달라고 해도 절대 안나가겠다’는 분들이다. 며칠 전 거의 1년 만에 회사에 나갔다. 중앙일보 사진기자의 취재에 응하기 위해서였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을 우려한 직원들이 내 출근을 극구 말렸는데도 '기자 탓’하며 회사를 들렀다. 유럽에서, 뉴욕에서, 곳곳에서 걸려오는 전화주문, 온라인 오더에 바삐 움직이는 그들이 무척 고마웠고 대견했다. 따지고 보면 지난 2003년 새해 첫날 미주한인이민 백주년기념 꽃차가 로즈 퍼레이드를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었던 것도 회사 직원들의 땀이 맺은 열매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성 싶다. 솔직히 말해 한인커뮤니티에서의 내 활동은 직원들이 열심히 일해 돈을 벌어줬기에 가능했을 터다. 박용필 전 논설고문

2021-02-03

[토마스 정](6) 한인상권·틈새시장 가능성 보고 한인은행 투자

자본금 바닥 문닫을 위기 미주은행 증자 참여 영화포레스트검프보고민물장어수출도전 할리우드의 대박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내게 니치 마켓(niche market)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작품이다. 니치 마켓은 수요는 있는데 공급이 틈새처럼 비어있는 시장을 일컫는다. 내게는 주인공 검프(톰 행크스 분)와 그의 절친 버바(마이켈티 윌리엄슨 분)와의 대화가 가장 인상깊은 장면이다. 베트남의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버바는 검프에게 제대 후 새우잡이 창업을 제안한다. 회사는 두 사람의 이름을 딴 ‘버바 검프 슈림프 캄퍼니’. “새우는 바다의 과일 같은거야. 바베큐도 해먹고, 삶아도, 구워도 먹고, 센 불에 재빨리 볶아도 먹고….” 대화의 방점은 ‘바다의 과일(the fruit of the sea)’에 찍혀있다. 버바는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 출신. 그의 끝없는 새우 예찬에 검프는 흔쾌히 동의한다. 그러나 제대를 앞둔 어느날, 친구는 적의 기습공격으로 치명상을 입는다. 검프의 가슴에 안겨 눈을 감는 버바. 검프는 전우와의 약속을 지킨다. 새우잡이 회사를 차려 백만장자가 되고…. 이 대목에서 퍼뜩 장어가 떠올랐다. 언젠가 메릴랜드의 한 식당 주인에게서 뉴올리언스가 장어의 본고장이라고 말한 걸 기억해냈다. 뉴올리언스는 바닷물과 민물이 합쳐지는 곳이어서 어족이 풍부하다. 장어는 멀고 깊은 바다에서 산란하지만 새끼가 부화하면 바다를 거슬러 어미가 살던 하천으로 되돌아온다. 연어와는 반대로 회귀하는 어족이다. 미국인들은 장어를 뱀으로 여겨 먹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 유럽 등지에선 장어가 고급어종이다. 새우는 어림도 없겠지만 장어 만큼은 미국인들과 경쟁이 거의 없어 틈새를 노려볼만 했다. 내게는 장어가 ‘바다의 과일’인 셈이었다. 영화 속의 주인공 검프처럼 뉴올리언스로 달려갔다. ‘민물장어의 꿈’을 안고서. 과연 듣던대로 ‘물 반, 장어 반’이었다. 뉴올리언스에서 두 달을 넘게 지내며 ‘장어 대박’의 꿈에 한껏 부풀었다. 장어 ‘트랩’ 구입과 양어장 마련 등 시설 투자에만 50만 달러를 쏟아 부었다. 장어는 포획보다 판로 개척이 예상외로 쉽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에선 생태계 파괴를 우려해 활어 반입이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싱싱해야 제 값을 받을 수 있는데. 궁여지책으로 유럽시장을 뚫기로 했다. 무작정 네덜란드의 미국 대사관을 찾아간 것. 경제담당 영사를 만나 도움을 청했다. 1주일 뒤 면담 날짜가 잡혔다. 약속한 시간을 정확히 지킨 영사는 내게 두툼한 서류봉투를 건넸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얼마나 시장조사를 철저히 했는지 보고서엔 나라 별 장어 수요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그때 무릇 공직자의 자세는 이런거구나 실감을 했다. 영사는 일면식도 없는데도 자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다. 가끔 한국서 고위 관리의 처신이 논란이 되는 기사를 읽으면 그 미국 외교관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민물장어의 꿈’은 이런 저런 장벽에 막혀 결국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장어를 통해 얻은 수확은 결코 적지 않았다. 뉴올리언스에서 두 달을 지내며 장어를 거의 매일 먹다시피 했다. 그러던 어느날 흐릿하게만 보였던 TV 스크린이 또렷하게 닥아왔다. 어, 이게 웬일. 이번엔 신문을 펼쳤다. 내가 기사를 읽을 수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장어가 내 시력을 거의 정상으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그 때의 그 기쁨이란. 한편으론 슬픔이 밀려왔다. UCLA의 경제학 박사학위가 어른거려서다. 대학병원 의사가 실명의 위험이 있다며 내게 박사과정 포기를 강권했지 않은가. 내가 박사학위를 받았다면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가끔 궁금해지기도 한다. 아마 귀국해서 교수를 하다가 은퇴, 지금쯤 백수로 지내고 있을지 싶다. 나는 지인들과 외식을 하게 되면 주로 장어덮밥, 장어구이 등을 시켜 먹는다. 그러면 ‘저 나이에 아직도 정력을?’ 눈총 받기 십상이다. 내게 장어는 정력 보양제가 아니라 시력 강화제인데…. 요즘도 주 2~3회 정도는 집에서 장어를 구워먹는다. ‘민물장어의 꿈’에서 깨어난 나는 또다시 니치 마켓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번엔 전공을 살려 커뮤니티 은행 쪽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20년 전만 해도 한인은행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했지만 성장가능성이 꽤 높아 보였다. 한인인구가 꾸준히 유입되고 한인상권이 날로 커지고 있어서다. 내게 처음 은행투자를 권유한 분은 벤자민 홍 행장이다. 우연한 기회에 골프를 함께 쳤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골프채가 매우 낡아 보였던 것. 은행장 정도 됐으면 유명 브랜드의 클럽을 가질만도 한데…. 왠지 모르게 그의 골프채에 마음이 끌렸다. 얼마 후 홍 행장이 집에 찾아왔다. 투자 유치를 위해서다. 처음엔 완곡하게 거절했다. 다 망해가는 은행(당시 미주은행)에 뭔 투자? 은행에 관심은 있었으나 미주은행은 아니었다. 훗날 알게 됐지만 벤자민 홍의 미주은행 행장 취임은 ‘배짱’이 작동한 결과물이었다. 은행 측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자 시쳇말로 ‘쎄게’ 불렀다. 쓰러져 가는 은행이어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연봉도 적정가의 2~3배를 요구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그의 배짱이 은행을 살려냈을 뿐더러 한인은행의 대형화에 주춧돌을 놓았다. 은행 측은 그런데도 그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사태가 워낙 급박했던 탓이다. 당시 미주은행은 자본금을 거의 다 까먹어 파산직전이었다. 은행 감독국은 150만 달러 이상의 자본금 충당을 요구한 상태. 기일 내 마무리 짓지 못하면 은행문을 닫아야 할 판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울며겨자 먹기로 홍 행장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졸지에 좌초 직전의 은행을 떠맡게된 홍 행장은 당장 투자자들을 끌어들여 급한 불을 꺼야 했다. 소방수 제 1호로 나를 ‘찜’한 것이다. 내가 거부의사를 밝혔는데도 홍 행장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홍 행장의 끈질긴 권유로 미주은행에 발을 디디게 된다. 나의 은행을 상대로 한 니치 마켓 도전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전열을 정비한 미주은행은 나라은행으로 이름을 바꿔 달고 새 역사를 쓰게 된다. 박용필 전 논설고문

2021-02-01

[토마스 정](5) 죽으려 스쿠버다이빙 하다 살길 찾다

성공의 어머니는 실패가 아니라 자기성찰 맞춤가발로 재기…파리 유명인사도 주문 신문사로부터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주제로 원고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지만 솔직히 내겐 ‘숨기고 싶은 이야기’가 더 많다. 세상에 드러내기 부끄러운 그런 과거다. 창피스런 과거 중 하나가 ‘스쿠버 다이빙’이다. 혹 내가 돈자랑 내지는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이 얘기를 하는 게 아닌가 지레 짐작하겠지만 천만에. 나는 홀딱 망하고 나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스쿠버다이빙을 배웠다. 1969년 8월 쯤이다. 샌타모니카 비치에서 태평양 바다를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괜히 유학을 와 가지고…. 세관에 그냥 눌러앉았으면 지금쯤 룰루랄라 잘 지내고 있을텐데.’ 고생을 사서 하는 것 같아 후회막급이었다. LA로 돌아오는 길에 간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스쿠버다이빙 아카데미.’ 무엇에 홀렸는지 무작정 들어갔다. 매니저와 마주 쳤는데도 애써 나를 무시하는 듯 했다. 아마 스쿠버다이빙을 백인들의 전유물쯤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스쿠버다이빙을 배우고 싶다고 말을 걸었는데도 말투가 아주 퉁명스러웠다. 다짜고짜 ‘몇 살이냐’고 묻는 거였다. 그때 내 나이 50줄이었으니…. 매니저는 아무말 없이 손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나가라’는 제스추어였던 것. 그때 무슨 용기가 났는지 그를 붙잡고 통사정을 했다. 그제사 나를 딱하게 여긴 매니저가 조건부로 입학을 허가해줬다. 첫째는 ‘고령자’여서 정식 라이선스는 못내주겠다는 것. 그리고 사고가 나도 아카데미 측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 스쿠버다이빙은 수중 호흡기를 지니고 잠수해 체력을 단련하는 스포츠다.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으면 자칫 심정지를 일으켜 물 속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다. 그래서 2인1조로 훈련을 한다. 서로 감시하기 위해서다. 훈련생들은 모두 짝짓기를 했는데 나와 어느 뚱보여성 둘만 남았다. 나는 동양인이어서, 뚱보는 위험유발자로 간주했는지 기피인물로 찍혔던 것. 결국 우리 둘은 의도치 않게 파트너가 됐다. 그래도 우리는 호흡을 잘 맞춰 4주과정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잠수훈련 중 전복을 따는 재미도 쏠쏠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스쿠버다이빙을 하게 된 동기는 바닷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기 위해서였다. 삶의 의욕도 없고, 비즈니스 재기의 희망도 없고.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장소로 바닷속을 택한 것이다. 숨기고 싶은 얘기지만 용기를 내 글로 남긴다. 평생 꽃길만을 걸을 것 같던 가발사업이 갑자기 브레이크가 걸렸다. 일본산 인조모 가발이 시장에 범람하는 바람에 비즈니스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합성섬유로 만든 가발은 대규모 생산이 가능해 가격면에서 인모 가발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쌌다. 고객을 인조모 가발에 빼앗긴데 이어 한국공장에서 말썽이 생겼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할까. 은행빚에 내몰려 더 이상 비즈니스를 꾸리기가 불가능했다. 보다 못한 유대계 고문변호사가 내게 파산신청을 적극 권했다. 수임료를 받지않겠다면서다. 법원이 내 파산신청을 받아들인 날 샌타모니카의 스쿠버다이빙 아카데미를 찾은 것이다. 죽겠다는 심정으로. 그때 깨달음을 얻은 게 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자기성찰이 성공의 어머니’라고 바꿔 써야 된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했다. ‘남의 핑계’ ‘비즈니스 환경 탓’만 하다보면 실패를 거듭할 뿐이다. ‘불굴의 기업인’ 잭 웰치도 제너럴 일렉트릭(GE) 회장시절, 이런 말을 했다. “실패에서 배우지 않으면 성공은 결코 불가능하다.” 자기성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일 터다. 스쿠버다이빙의 쇼크에서 벗어난 나는 재기에 온 힘을 쏟았다. 결과물이 바로 맞춤가발이다. 두상에 맞게 본을 뜬 다음 본인이 가지고 있는 모발의 굵기, 색상 등을 파악해서 디자인하는 방식이다. 고객 특화 가발이라고 할까. 이 부문 특허도 냈다. 아마 가발과 관련해 특허를 받은 것은 내가 처음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뉴욕 등 미 전국에서 뿐만아니라 최근엔 패션의 본고장 프랑스 파리의 유명인사들로부터도 주문이 들어온다. 그래서일까. 60년 전 나를 가발이라는 신비의 세계로 이끌었던 맥스 팩터가 요즘 부쩍 생각난다. 당시 가발 하나에 $4,700의 가격표를 부쳐 나를 놀라게 했던 바로 그 회사다. 또 하나의 교훈은 돈과 관련해서다. 나는 ‘돈이 사람을 알아본다’는 말을 가끔 후배들에게 해준다. 1달러짜리에 답이 나와있다. 돈 뒷면엔 피라미드가 인쇄돼 있는데 13층 짜리다. 아마 독립당시 13개주를 상징하지 않나 싶다. 이 피라미드 꼭대기에 만물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이 그려져 있다. ‘메시아의 눈’이라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 글귀가 적혀있다. 잘 안보이면 확대경으로 보기 바란다. ‘아뉴이트 셉티스(Annuit Coeptis).’ 인터넷을 검색하면 뜻이 나온다. ‘신은 우리가 하는 일에 미소를 지으신다’쯤이 되겠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야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석해도 될 것 같다. 결국 돈이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후 나는 한 눈 팔지 않고 내 비즈니스에만 전념했다. 부동산에 투자하면 억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유혹을 마다한채. 내 소유의 부동산은 웨스트 LA쪽 윌셔 불러바드에 위치한 3층짜리 회사 빌딩 하나 뿐이다. 100년도 훨씬 넘은 LA에선 문화재급 건물이다. 시정부의 허가 없이는 개보수도 함부로 못한다. 나는 이 건물을 볼 때마다 무한애정을 느낀다. 이곳엔 오래전 LA 주재 한국총영사관이 세들어 살았다. 1층은 뱅크오브아메리카((BoA), 2~3층은 총영사관이 렌트해 업무를 봤다. 내 건물에 LA 한인사회의 역사가 살아 숨쉰다는 생각만 해도 얼마나 가슴이 뿌듯한지. 한때 주변에선 내게 재테크 수단으로 부동산 투자를 강권하다시피 했다. 크레딧도 좋을 뿐더러 더구나 은행 대주주여서 쉽게 재원을 조달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쉽게 돈 벌 방법이 있다는데도 난 귀담아 듣지 않았다. 신이 내 부동산 투기에 미소를 짓지 않을까 두려워해서다. 1달러 짜리 돈이 하찮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겐 돈과 재물에 늘 겸손하라는 경구나 다름없다. 박용필 / 전 논설고문

2021-01-27

[토마스 정](4) 4700불 가격표 보고 뛰어든 가발사업 대박

일본에 첫 주문…미용실 다니며 판매 가발로 돈 벌어 한국 국회의원된 이도 ‘엿장수 맘대로’라는 우스개가 있다. 어릴 적 가장 반가웠던 손님은 뭐니 뭐니해도 ‘엿장수’였을 거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절겅대는 가위소리가 들려오면 약속이나 한듯 쪼르르 달려가 엿장수 뒤를 따랐다. 오는 날짜도, 가위질 하는 것도 ‘엿장수 맘대로’였지만 늘 반갑기 그지 없었다. 엿장수는 현금은 물론 안받는 물건이 거의 없었다. 다 떨어진 고무신 한쪽, 양은 냄비하며…. 가끔 “재는 왜 많이 주고 난 쬐끔만 주나요” 항의하면 “야, 엿장수 맘이여”하며 꿀밤을 주기도 했다. 엿장수가 가장 좋아했던 물건이 바로 여자 머리카락이었다. 짧은 머리는 아예 받아주지 않았다. 긴 머리를 갖고 오면 엿을 한 뼘이나 더 잘라 줬다. 1960년대 한국의 외화벌이는 엿장수가 수집해온 머리카락이었다. 내가 처음 머리카락을 수입해 미국 가발회사에 팔았다. 처음 납품했던 곳은 ‘맥스 팩터(Max Factor).’ 하일랜드와 할리우드 불러바드 코너에 있었는데 지금도 건물이 남아있다. 회사는 이미 망한지 오래 됐지만. 비즈니스가 제법 쏠쏠했다. 어느날 우연히 쇼윈도에 걸린 가발에 눈길이 갔다. 가격이 $47.00. ‘뭐 이렇게 비싸. 내 머리카락을 갖고 폭리를 취하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된 순간인지도 모른채. 몇 주 후 납품 날짜에 맞춰 회사를 찾았다. 이왕 온김에 ‘아이쇼핑’이나 하자며 쇼윈도를 다시 둘러 본 것.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두 눈을 씻고 봐도 가격은 그대로 였다. $4,700! 지난번 가격표는 내가 잘못 본 것이었다. 47달러도 비싼데 세상에 4700 달러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저걸 누가 사나. 할리우드 수퍼스타 쯤이나 돼야 살지 모르겠다. 그날부터 머리카락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저걸 내가 가발로 만들어 팔면…. 생각만해도 가슴이 부풀어오르며 온몸이 짜릿해졌다. 뜻이 있는 곳에 정말 길이 있는걸까. 얼마 후 회사 매니저로부터 머리카락을 직접 공장에 갖다주라는 지시를 받았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버뱅크 공장에 머리카락을 넘기며 사정을 했다. 무보수라도 좋으니 일을 하게 해달라고. 공장장은 내 속셈을 알아챘는지 일언지하에 퇴짜를 놨다. 나는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아무리 뜻이 있어도 길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한국서는 가발 붐이 일어나기 전이어서 도움받을 곳이 전무했다. 그때 문득 ‘사무라이’가 떠올랐다. 일본 무사의 머리에 두른 것이 가발일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친 것. 토쿄와 오사카 두 곳 상공회의소에 편지를 썼다. 한 달 후 쯤 토쿄 상의에서 회신이 왔다. 여기서 에피소드 한 토막. 나는 편지를 영어로 썼는데 답장은 일본말로 쓰여져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세계화가 안돼 있었던 모양이다. 그 큰 상공회의소에 영어편지 하나 쓸 줄 아는 직원이 없다니. 토쿄 상의가 한 군데를 소개해줬다. 그 회사에 샘플 하나를 주문했는데 12달러 50센트를 선불로 주면 곧 보내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우여곡절 끝에 가발을 손에 쥐었다. 이게 바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구나. 4700 달러가 눈에 어른 거렸다. 문제는 판로. 이걸 어디에다가 팔지? 샘플을 들고 무작정 미장원을 돌았다. 대부분 가발을 처음 본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막막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가 어떻게 입수한 가발인데. 내 가발의 ‘진가’를 알아 준 곳은 샌디에이고의 어느 고급 미용실. 남자 미용사가 나를 맞았다. 아래 위를 훑어 보더니 ‘헤어컷을 하러 왔느냐’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동양인이, 그것도 꾀죄죄한 차림을 하고 있었으니 그럴만도 했겠다. 가발을 살 생각이 있느냐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갑자기 미용사의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가격이 얼마냐’고 관심을 보인 것. 나는 ‘얼마면 사겠냐’고 되물었다. 500 달러를 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맥스 팩터 제품은 4700달러인데. 아쉬움은 있었지만 원가($12.50)를 생각하면 40배가 넘는 장사다. 미용사가 내가 갖고 있는 걸 다 팔라며 ‘현금박치기’를 제의했다. 지금은 샘플밖에 없지만 몇 개가 필요한지 알려주면 한 달 후 그 물량을 맞춰주겠다고 했다. 미용사의 주문량은 24개. 곧바로 머리를 굴려 계산을 해봤다. 일본 메이커에 줄 돈은 300 달러. 내게 떨어지는 돈은 자그마치 1만2000 달러. ‘야호!’ 내게도 이런 재물운이 있다니. 그런데 일본회사와는 첫 거래여서 선금을 줘야했다. 내게 그만한 돈이 있을리 없었다. 롱비치 대학시절 친하게 지냈던 이도제에게 급전을 빌려 송금했다. 물건은 약속한 날짜에 배달됐다. 한껏 꿈에 부풀어 샌디에이고로 씽씽 차를 몰았는데 그 미용사가 배신을 때릴 줄이야. 가격을 500 달러에서 절반으로 후려치는 게 아닌가. 꼼짝없이 그가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고 말았다. 마땅히 팔 곳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개당 250 달러를 받고 몽땅 처분을 했다. 그래도 6000 달러나 되는 돈을 벌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초창기 시절 가발과 관련한 해프닝이 적지 않았다. 그중 압권은 조 모씨가 운영했던 가게. 가발 하나를 99 달러에 판다는 세일 광고를 LA 타임스에 실었다. 피코에 있던 그의 가게가 인파로 넘쳐났다. 나중엔 기마경찰이 출동하는 코미디까지 빚어진 것. 그는 가발을 재봉틀로 누벼냈다. 가격이 경쟁력이 있다보니 특히 흑인들이 주고객이 됐다. 부실공사를 한 때문이었는지 반품소동이 빚어지기도 했지만. 그 무렵 조씨가 가발로 떼돈을 벌었다는 루머가 한인들 사이에 퍼졌다. 그는 한국에 가 소원대로 금배지를 달았다. 여당 실세에게 40만 달러를 줬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정계에서 강제 퇴출당해 다시 LA로 돌아왔다. 가발과 관련한 ‘웃고픈’ 얘기가 어디 하나 둘일까. 머리카락에서 가발까지. 미국에서 나의 삶은 그렇게 자리를 잡았다. 박용필 / 전 논설고문

2021-01-25

[토마스 정](3) "내가 한국 김 처음으로 수입했습니다"

부산세관 상사의 잡화점 인수 LA정착 은행원 등으로 투잡 뛰다 무역에 눈 떠 서던 일리노이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기 얼마 전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보낸이는 구종서. 그 이름 석자가 얼마나 반가웠든지. 그 분은 내가 부산 세관 근무시절 과장님이셨다. 서기관급이어서 꽤 높은 직위였다. 1950년대 세관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꿈의 직장’으로 불렸다. 약간 명을 뽑는데도 세관공무원 모집 공고가 나가면 수백명이 몰렸다. 하지만 성적순은 아니었다. 든든한 ‘빽’이 있으면 성적이 미달돼도 합격의 기쁨을 누렸으니까. 6.25 때 끌려오다시피 해서 전쟁터로 내몰린 병사들이 ‘빽!’하고 죽었다는 얘기가 결코 우스개는 아니었다. 나는 필기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뒷 배경이 없다고 1등을 떨어트릴 수는 없었을 터. 난 당당히 실력으로 ‘넘사벽’이었던 세관 진입에 성공했다. 처우는 형편없었다. 그 봉급으로는 혼자 살기에도 버거웠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뒷구멍 수입’이 엄청났다. 세관심사를 통과하려면 담당공무원에 돈을 찔러줘야 했다. 비리의 종합세트가 바로 세관이었던 것. 왜 ‘꿈의 직장’으로 불렸는지 그제서야 알게 됐다. 내가 미국유학을 결심한 것도 이 같은 부조리가 이유 중의 하나로 작용했다. 구종서 과장은 당시 고위공무원 가운데 비리에 멀찌감치 비켜 서 있었다. 인품도 ‘젠틀’했다. 나하고는 비교적 죽이 잘 맞았다. 그런 분이 내게 연락을 해 온 것이다. 우표 소인 찍힌 곳이 LA여서 의아했다. 한국에 계셔야할 분이 어떻게…. 알고 보니 1년 전 LA에 자리를 잡아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분의 자초지종 설명이 나를 충격에 빠트렸다. 세관 근무 당시 유럽 출장을 가 선진국들을 두루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대도시마다 차이나타운, 재팬타운이 있어 매우 부러웠다는 것이다. 이왕이면 큰나라 미국에다 코리아타운을 세워보겠다며 무작정 LA를 왔다는 것이다. ‘꿈의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그런데 갑자가 사정이 생겨 귀국을 하게됐으니 내가 와서 가게를 운영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못다 이룬 자신의 꿈을 내가 이뤄졌으면 좋겠다며. 가게 이름은 자신의 이름을 딴 ‘구스 트레이딩 캄퍼니.’ USC와 대한인국민회관과 인접해 있었다. 약간의 한국식품과 자개그릇 등이 진열돼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LA한인사회에서 구종서를 아는 사람은 나 말고 아무도 없다. 1년 여 머물다 돌아갔지만 그 분은 명실공히 코리아타운 최초 설계자다. 그 꿈 또한 원대했다. 오늘날 윌셔 불러바드의 번창한 거리를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구종서는 2000년대의 오늘을 내다본 선각자였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구스’ 운영을 맡았지만 한국 그로서리는 이미 부패해 실제 팔 물건은 거의 없었다. 내가 LA에 온 것도 UCLA에서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서였지 장사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당장 먹고 살 일이 급했다. 낮에는 유니언 뱅크에서, 저녁엔 메이 캄퍼니란 곳에서 ‘알바’를 했다. 소위 투잡을 뛴 셈이다. 잠은 가게 한 켠을 치워 매트레스를 깔고 잤다. 시간을 이대로 흘려 보낼 수는 없었다. 경제학 석사가 은행에서 한낱 텔러 노릇을 하다니.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우연한 기회에 ‘나카주가’라는 일본인 사업가를 만난 것이 계기가 돼 무역에 눈을 뜨게 됐다. 일본서 김을 수입, 판매하고 있던 그로부터 김의 유통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나카주가는 중간과정(일본)을 생략하고 한국서 김을 직수입하면 단가가 낮아져 시장규모가 커질 것이라며 내게 김 수입을 적극 권했다. 귀가 솔깃했다. 즉시 한국의 지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한달 후 쯤 김이 샘플로 왔는데 이게 웬일. 파릇파릇해야 할 김이 태평양을 건너는 사이 누렇게 변색돼 버렸다. 상품가치가 전혀 없었다. 여기저기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해결책을 찾아 봤다. 아주 간단했다. 김을 구우면 색깔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 드디어 한국산 김이 완제품으로 미국에 수입됐다. 한국서도 첫 수출이었다. 나카주가가 약속대로 전량 구입했다. 무려 1만 달러. 첫 거래치고는 엄청난 액수였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그 당시 개스값이 갤런 당 평균 20 센트였다. 가난한 유학생에게 얼마나 큰 돈이었는지 상상을 해 보시기 바란다. 한국의 생산업자에게 5000 달러를 송금하고 나머지 5000 달러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거금을 쥔 그 때의 그 감격이란. 솔직히 벼락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세상의 돈이란 돈은 내가 다 가졌다’며 기고만장했다. 요즘 한국서는 김을 일컬어 ‘바다의 반도체’라 부른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반도체가 대한민국을 먹여살리듯 김이 어촌에서 그 역할을 해 낸다고 해서 나온 말일 것이다. 그 동안 해산물 가운데 부동의 1위를 지켰던 참치를 밀어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선 김이 귀했다. 비싸서 1톳(100장)씩 사 먹지 못해 상인들은 10장씩 낱개 묶음으로 팔았다. 수출하느라 정작 밥상에선 귀한 몸이 됐다. 한국의 산업화에 효자노릇을 톡톡히 한 것이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김의 수출액은 거의 6억 달러에 이른다. 최대 소비처는 미국으로 한해 거의 1억4000만 달러에 육박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과거엔 해조류를 ‘바다의 잡초’따위로 여겼는데 이젠 건강식품으로 부각되고 있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특히 김은 일반 해조류보다 단백질 함량이 월등히 높다. 미국서 ‘수퍼푸드’로 불리는 이유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좋은 김을 고르는 팁을 소개해 드린다. 윤기가 나는지 불빛에 비춰보면 안다. 기름 바르지 않아도 매끄럽고 반짝반짝해야 상등품이다. 구멍이 많거나 회백색 점이 많으면 건강하지 않다는 증좌다. 요즘은 테리야키, 매운 맛 등 각종 맛을 가미하거나 아몬드, 코코넛 등을 첨가한 간식 김이 개발되고 있다. 일본은 자신들이 김의 종주국이라고 주장하지만 글쎄다. 미국서 일본산 김은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 코스트코에 한국산 김이 수북히 쌓여 있는 걸 보면 정말이지 가슴이 뿌듯해진다. 맘 속으로 한 번 크게 소리쳐 본다. “내가 처음으로 한국서 김을 수입했습니다. 애국자예요.” 박용필 전 논설고문

2021-01-18

[토마스 정](2) 간디스토마 걸리자 이민국서 추방명령 날벼락

대학에서 전염병 아니라고 설득해 추방 모면 매년 장학금 받는 후배들 감사 편지에 큰 보람 매년 봄 학기가 시작될 쯤이면 하루에도 몇 번씩 메일박스를 살펴보는 게 습관처럼 돼있다. ‘오늘은 안 오려나?’ 이맘 때는 대학 후배들이 감사편지를 보내온다. 모두 ‘토마스 & 샤니 정 스칼라십’ 수혜자들이다. 편지를 읽다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대학시절로 되돌아가는 듯 해 얼마나 흐뭇한지 모른다. 60여 년 전 친구들의 얼굴이 오버랩되면서 새삼 그 때가 그리워진다. 내 모교는 서던 일리노이 대학(SIU)이다. 일리노이주 남쪽에 소재한 카본데일에 캠퍼스가 있다. 1800년대 중반 세워진 유서깊은 대학이다. 20년 전 모교에 150만 달러의 장학금을 냈다. 재정상태가 썩 좋은 건 아니었지만 더 이상 미루다간 못할 것 같아 결단을 냈다. 수혜자는 연 20~30명 가량이다. 처음엔 장학금 지급대상자를 한국계로 특정할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접었다. 미국은 다인종 다민족 사회 아닌가. 문득 이 나라의 건국이념이 떠올랐다. ‘이 플루리버스 유넘(E pluribus unum).’ 우리말로 옮기면 ‘여럿이 모여 하나’라는 라틴말이다. 그런데 한국계는 지금까지 단 한 명도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장학금 설립자가 한국인인데….’ 가끔 섭섭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쩌랴, 대학 측 기준에 미흡하니. ‘봐주기’ 없는 대학 측의 엄격한 선정기준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사실, 처음 적을 둔 미국 대학은 미줄라의 몬태나 주립대학이다. 모든 것이 서툴고 적응이 어려웠다. 특히 영어가 내 발목을 잡았다. 어느날 교수 한 분이 내게 짖궂은 농을 던졌다. “자넨 (미국) 여학생과 데이트를 해야겠네.” 미국여성과 사귀며 ‘브로큰 잉글리시’를 떨쳐내라는 비아냥이었던 것. 그래도 그 교수의 조크를 진정성 있는 충고로 받아들였다. 학기가 시작된지 얼마 안돼 나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 처음엔 결핵이 의심됐으나 대학병원 측 정밀검사 결과 간디스토마로 판명이 났다. 그러나 이민국이 개입하면서 사태가 악화됐다. 전염병에 감염됐다며 추방명령을 내린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꿈이 날아갈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다행히 대학 측이 전염병이 아니라고 이민국을 설득해 추방을 면했다. 결국 한 학기를 통째로 날려버린 나는 ‘탈 몬태나’를 감행, LA로 진로를 바꿨다. 롱비치 대학에 새 둥지를 튼 것. 공부하랴 일하랴, 하루 24시간을 쪼개 썼지만 학비 대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내게도 ‘기적’이란 게 찾아왔다. 서던 일리노이 대학에서 전액 장학금 제의가 온 것이다. 곧바로 짐을 싸고는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올랐다. 도중 라스베이거스에서 휴식이 주어졌다. 처음으로 슬롯머신이란 걸 해봤다. 동전 몇 개를 넣었는데 갑자기 불이 번쩍번쩍하며 난리가 났다. 기계를 망가트렸으니 겁이 날 수밖에. 가난한 유학생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딱 하나. 줄행랑을 쳤다. 잭팟이 터진줄도 모르고. 서던 일리노이 대학은 내게 또 하나의 선물을 안겼다. 한달 생활비조로 200 달러를 준 것. 세금을 제하고 191 달러를 손에 쥐었다. 모처럼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대학엔 한국 유학생이 20여 명 있었다. 모두 내로라하는 고관대작의 자제들이었다. 이들의 또다른 공통점은 군 미필. 나만 군대를 갔다왔으니 그들 세계에선 내가 딴나라 사람으로 보였을 게다. 돈도 빽도 없는 내가 유학의 기회를 잡은 건 오로지 전쟁 덕분이었다. 상이군인들에겐 특혜가 주어졌다. 목숨과 미국을 맞바꿨다고 할까. 이들 가운데 지금까지 교유하고 있는 평생의 벗이 있다. 정치학을 전공한 신황식 군은 교수가 돼 모교에서 정년퇴직했다. 당시 그는 ‘마사코’라는 일본여성과 사귀고 있었는데 우리는 주말이면 30여 마일 떨어진 미주리주 세인트 루이스로 가 장을 봤다. 일본 마켓이 있어 필요한 식품을 샀다. 마사코와의 사랑이 깊어지자 신 군은 내게 고민을 털어놨다. 부모님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터. 내가 해결책을 내놨다. ‘귀국하려면 마사코와 헤어지고 미국서 살려면 결혼하라.’ 그러면서 협박성 충고도 날렸다. ‘앞으로 마사코와 같은 여자는 절대 못 만날거다.’ 내 ‘협박’이 맞아 떨어졌는지 그는 마사코를 평생의 반려자로 맞았다. 2년 전 내 생일에는 부부가 멀리 필라델피아에서 비행기를 타고와 축하를 해줬다. 당시 대학에는 중국 학생들이 꽤 많았다. 이들은 큰 집을 빌려 한 집에서 살며 생활비를 아꼈다. 단합이 아주 잘됐다. 얼마나 부러웠던지. 인도와 베트남 출신 학생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들은 분열과 반목이 일상이었다. 그때 느낀 게 있다. 식민지 출신은 단결이 어렵다는 것. 종주국이 식민지 백성을 분열 통치(divide and rule)해 이같은 성격이 고착화되지 않았나 싶다. 서던 일리노이는 솔직히 내 삶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처음엔 내게 ‘배움’의 기회를 줬지만 나중엔 ‘명예’를 씌어줬다.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회과학대학원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명예박사학위 대상자로 선정됐다는 뜻밖의 소식이었다. 그런데 요구사항이 많았을 뿐더러 절차 또한 매우 까다로웠다. 보통 3~4년 걸리는데 나는 1년만에 심사가 끝냈다. ‘내가 박사 가운을 입다니…’ 감개무량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가 싶었다. 당초 나는 UCLA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논문을 쓸 즈음 갑자기 눈이 나빠졌다. 대학병원 검사결과는 내게 깊은 좌절감을 안겼다. ‘책을 절대 가까이 하지 말라.’ 담당의사가 내린 극단적인 처방이었다. 자칫 실명할 수도 있다면서다. 내 꿈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결국 UCLA 박사를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내 모교에서 명예박사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이제야 꿈을 이룬 것 같아 기뻤지만 한편으론 아내(샤니 정)를 볼 면목이 없었다. 살림하랴, 비즈니스 챙기랴 1인2역의 삶을 사느라 자신의 대학원 꿈을 포기했으니 말이다. 그해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20여 명이나 됐지만 명예학위는 나 혼자였다. 대학원장은 축사의 절반을 나를 소개하는데 할애해 정말이지 몸둘 바를 몰랐다. 그것도 맨 처음으로. 학위 수여식에는 고맙게도 벤자민 홍 행장이 동행해 줬다. 그날의 소회를 홍 행장이 중앙일보에 기고했다. 간추리면 이렇다. “명예박사는 학술적 기여, 사회공헌 등 한 개인의 총체적 역량을 두루 감안해 수여하는 학위다. 이민 백주년을 맞는 우리에게 뜻 깊은 선물이다. 오늘 만큼 내가 한국인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박용필 전 논설고문

2021-01-13

[토마스 정](1) "절반이 전사한 전우 수첩, 내 버팀목이었다"

여의도 공항 떠나 나흘 만에 몬태나주 도착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건 아닐까’ 짙은 회한 1958년 9월 20일의 서울 여의도 공항. 조국의 늦가을 하늘은 유난히도 아름다웠다. 배웅 나온 가족 친지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는 서둘러 비행기 트랩에 올랐다. 승객은 20여 명 남짓. 대부분 일본가는 손님들이었다. 언제 학업을 끝내고 돌아올지 기약이 없는 여행길이어서 만감이 교차했다. 당시는 아직 김포공항이 완전히 복구되기 전이어서 여의도가 대한민국의 유일한 국제관문이었다. 숨을 길게 들여마시는 순간 짙은 회한이 내 머리와 가슴을 짓눌렀다. 혹시 내가 비겁한 건 아닐까. 나 혼자 잘 살겠다며 도망치다니. “용석아, 너 어디 있니. 정말 보고 싶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출국 바로 전날, 젊은 여인이 집으로 찾아왔다. “아니, 제수씨가 어떻게….” 후배 김용석의 아내였다. 어린 아들을 등에 업은채 마지막 인사를 드리겠다며 나를 찾아온 것이다. “정 선생님은 이렇게 살아서 돌아와 미국유학까지 가시는데 그이는 아직 생사조차도 모르고… 우린 이제 어떻게 살지요.” 내 옷소매를 붙잡고 흐느껴 우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나도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이 안난다. 그저 함께 눈물만 흘렸던 기억밖에. 경상남도 진양이 고향인 나는 용석이와 대창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다.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도 이 학교 출신이다. 노 전 대통령 묘역이 있는 봉하마을은 읍에서 약 5km 떨어져 있다. 내가 용석이의 한 해 선배였다. 함께 모교에서 교편을 잡아 친형제나 다름없었다.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육군종합학교에서 장교교육도 같이 받았던 것. 나는 8기생, 용석이는 9기생으로 졸업해 각각 소위로 임관했다. 전쟁이 터지자 군 당국은 초급장교가 절대 부족해 이른바 ‘먹물’ 좀 먹었다고 하면 2개월 단기훈련을 거쳐 소위계급장을 달아줬다. 수십명 병사들의 생명줄을 쥐고 있으니 훈련의 강도가 요즘 젊은이들 말 처럼 ‘빡’셌다. 후보생 과정이 끝나고 밥풀떼기 하나를 달았다. 계급장이 부족해 대신 밥풀을 철모에 붙였다는 얘기가 우스개처럼 떠돌았던 시절이다. 그렇게 소위가 된 나는 뜻하지 않게 중화기 중대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동기생들은 시쳇말로 ‘꿀보직’을 받았다며 부러워했다. 한낱 소위에 불과한 내가 대위 보직의 중대장에 임명됐으니 그럴만도 했다. 교육성적이 우수한 때문인지 졸지에 ‘중대장’이 된 것이다. 강원도 양구의 8사단에 배치되자 마자 전투에 내몰린 나는 어느날 용석의 동생으로부터 ‘형이 실종됐다’는 참담한 소식을 들었다. 시신을 못찾았은 걸로 봐 포로로 끌려갔을 게 틀림없었다. 드디어 노스웨스트 프로펠러 항공기의 육중한 몸체가 굉음을 토해내며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서울 시가지가 잠깐 보이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륙한지 얼마 안돼 강원도의 헐벗은 산야가 한 눈에 들어왔다. 저 곳에서 거의 매일 삶과 죽음을 맞닥트리며 살아왔는데. 내가 미국을 가다니 믿기지 않았다. 내가 군생활을 했던 양구는 북쪽 철원의 ‘피의 능선’과 ‘철의 삼각지’로 이어지면서 6.25때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중의 하나였다. 우리가 고지를 점령하면 곧바로 적의 반격이 이어져 숨돌릴 틈도 없이 싸웠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임관하고 처음 중대장에게 신고하러 가는 길에 포탄을 맞고 숨진 전우도 있었다. 주위가 전부 산악지대여서 미군의 전차나 포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우린 쉼없이 전선에 내몰려 전진, 또 전진해야 했다. 양구의 ‘펀치볼’ 전투는 나중에 가곡 ‘비목’의 배경이 됐다고 들었다. 강원도 최전방에서 군복무를 했다는 어느 시인이 무명용사의 녹슨 철모와 돌무덤을 보고 노랫말을 지었다고 한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모를 비목이어라~.” 적막의 두려움과 전쟁의 비참함, 그 때문에 더욱 간절한 향수가 짙게 배어있다. 비행기를 타자마자 피곤이 엄습해 왔지만 그 뿐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미지의 세계에 가슴이 설레이는가 하면 한편으론 불안감이 나를 휘감았다. 돈도 없고, 영어도 시원치 않고, 아는 사람도 없고. 그야말로 없는 것 투성인데…. 나는 상의 안주머니에서 빛바랜 수첩을 꺼내들고는 깊은 상념에 빠졌다. 포켓용 수첩엔 동기생 199명의 인적사항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전사자와 실종자는 빨간 줄로 그어 생존자와 구분했다. 그러고 보니 절반 가량이 이미 ‘유고’ 상태였다. 유명을 달리한 동기생들의 얼굴이 하나 둘씩 겹쳐지는 순간 전쟁의 비정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뿐이 아니다. 중대장을 위해 하나 뿐인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려 했던 내 연락병. 그들 모두 이름모를 고지에서 짧은 삶을 마감해야 했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비행기는 어느새 한반도를 벗어나 태평양을 나르고 있었다. 그제야 긴장이 스르르 풀리며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이제 전쟁의 상흔은 훌훌 털어내고 오직 ‘아메리칸 드림’의 성취만을 생각하자. 이제 곧 세계 최강국 미국이 내 눈 앞에 펼쳐지는데. 젖과 꿀이 흐른다는 현대판 가나안 땅~. 그렇게 조국을 애써 잊고 싶었는데 내 삶의 고비마다 버팀목이 되어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 ‘수첩’이었다. 사업에 실패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했을 때 내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도 그 수첩이었다. 내 인생의 좌표이자 나침반이나 다름없는 수첩.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지금도 삶의 의욕이 불끈 솟는다. 나의 삶은 오롯이 그 수첩에 담겨있다고 해도 과장돤 표현은 아닐 터다. 나의 인생 제2막은 알래스카 앵커리지 공항에 발을 디디면서 시작됐다. 공항에서 난생 처음 화장지라는 걸 봤다. 물에 스르르 녹아 사라지는 종이. 불과 하루 전까지만해도 푸세식 변소에서 신문지를 비벼 밑씻개로 사용했는데. 가난한 한국의 청년에게 앵커리지 공항의 화장지는 신이 조화를 부린 물건인 듯 보였다. 누가 볼까 두려워 얼른 두루마리를 바지 주머니에 숨겨넣었다. 미국에서의 첫 날은 이렇게 화장지와 함께였다. 내 최종 목적지는 몬태나주의 미줄라. 여의도 공항을 떠난지 나흘만에 서부의 한적한 도시에 도착했다. 신이시여, 내게 축복을 주소서. 맘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박용필 객원기자

202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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